술 한 잔에 녹아든 이야기들, 익숙한 풍경 속 낯선 감정들. ‘한 잔의 밤, 두 잔의 이야기’는 누구나 겪었을 법한 밤의 단상들을 따뜻하게 풀어낸 에세이입니다.
그날도 별 건 없었어. 퇴근길에 적당히 지친 몸, 가벼운 한숨, 익숙하게 밝아 있는 편의점 간판. 그냥 집에 갈까 하다가, 뜬금없이 “소주나 한 잔 할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고, 그걸 누가 꺼냈는진 기억 안 나. 그렇게 한 잔이 시작되었고, 그 잔 속에 우린 각자의 이야기를 조용히 띄웠지.
술이 맛있다기보다는, 그 자리가 괜찮았던 거야. 텅 빈 술잔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말들, 어쩌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반쯤 취해야 겨우 꺼낼 수 있는 것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잔은 하나인데, 얘기는 둘
처음엔 단순한 근황 토크였지. 회사 어때, 요즘 좀 괜찮아졌냐, 그 팀장은 여전히 꼰대냐. 근데 묘하게, 술이 한 모금씩 들어갈 때마다 말들이 조금씩 무거워졌어. 표정은 가벼운데, 말끝은 무거웠달까.
그러다 어느새, 우리 둘 다 예전에 했던 선택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어.
“그때 그 일, 네가 맞았던 것 같아.”
“아니야. 그땐 나도 별로였지.”
서로 탓하지 않으면서, 그래도 다 지나왔으니까 웃으면서 말할 수 있었던 거야. 누가 옳고 그른 걸 따지기보단, 그때의 우리를 그냥 다정하게 바라봐주는 느낌.
술은 입을 열게 하고, 마음도 열게 하지
신기하게도 술이 들어가면 입이 먼저 열린다. 참아왔던 말들이 툭, 불쑥 나온다. 그게 진심인지 술김인지 스스로도 헷갈리지만, 어쨌든 나왔다는 게 중요하다.
“사실 나, 그때 좀 힘들었어.”
“왜 이제 말해?”
“그땐 말해봤자 뭐하나 싶었지.”
이런 대화는 늘 늦게 온다. 하지만 늦게 왔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니야. 오히려 시간이 지나서야 가능한 말들이 있잖아. 당장엔 너무 아파서 꺼낼 수 없던 것들. 시간이 약이라는 말,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더라.
술잔 위로 떠오른 그날의 기억들
술을 마시다 보면 이상하게 예전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처음 만났을 때, 처음 싸웠을 때, 같이 울었던 날. 그땐 왜 그렇게 사소한 걸로 싸웠을까. 또 왜 그걸 그렇게 오래 끌었을까.
기억은 때론 서운함보다 그리움을 더 많이 품고 있더라.
“그땐 참 많이 웃었지.”
“그래, 그랬었지.”
눈빛이 말해주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참 좋았어.’ 같은 것들.
결국 우리, 술을 빌려 말하고 싶은 거였을지도
이런 밤엔 술이 아니면 안 되는 말들이 있다.
‘보고 싶었어’
‘미안했어’
‘고마웠어’
이 짧은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만, 막상 나오면 참 많은 걸 풀어주지. 어쩌면 그걸 위해서, 우린 괜히 술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핑계를 대기도 뭣하고, 그냥 ‘한 잔 할래?’ 하면 모든 게 허용되는 그 틈.
그렇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어느새 말 못 할 이야기도 말할 수 있게 되는 밤.
“오늘은 좀 취하고 싶다”
이 말은 꼭 술이 마시고 싶다는 뜻만은 아니야.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핑계일 수도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고, 그저 ‘지금의 나’를 잠시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일지도.
그런 밤이 있다. 말보단 그냥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밤. 결국 중요한 건 술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잖아.
새벽은 진심을 부른다
거짓말처럼, 새벽이 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불빛은 낮아지고, 목소리도 조용해지고, 말 하나하나가 진짜가 되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눈빛으로,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했다.
“그냥, 네가 있어서 좋았어.”
이 말 한마디로 충분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말은 꼭 새벽쯤에야 나온다.
술은 비었지만, 마음은 가득 찬
술잔은 비었고, 테이블엔 땅콩 껍질만 남았다. 근데 희한하게도 마음은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오늘 나눈 이야기들이 어쩌면 다시 반복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진심이었으니까. 그리고 가끔은 그런 순간 하나가 오랫동안 힘이 되기도 해.
우린 결국, 그날의 대화를 기억하겠지. 말보단 분위기, 술보단 마음.
FAQ
Q1: 이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건가요?
A1: 특정 인물의 실제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구나 겪었을 법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에세이입니다.
Q2: 왜 ‘두 잔의 이야기’인가요?
A2: 술 한 잔은 분위기를 만들고, 두 잔째부터 진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니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미묘한 감정선이 두 번째 잔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Q3: 술이 있어야만 진심을 나눌 수 있을까요?
A3: 꼭 그렇진 않지만, 어떤 말들은 맨정신으론 꺼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죠. 그래서 술은 때때로 감정의 매개가 되기도 해요.
Q4: 이 글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A4: 우리가 나누는 진짜 이야기는 자주, 그리고 쉽게 나오지 않지만,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밤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만든다는 것.
마지막 잔을 기울이던 그 순간을 기억해. 그 잔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잔을 함께 나눈 사람이 누구였는지가 더 중요하니까.
가끔은 그날의 그 한 잔이, 내일을 견디게 하거든.